복수는 어쩌면 사랑과 함께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과제로 보인다.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소설의 주제가 복수이다. 실화인지 상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복수가 삶의 목적인 것으로 만들어진 스토리들도 많다.
현대의 삶에도 과거에 비하여 외면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복수의 행동이 드물지만 복수의 심리는 도처에 존재한다. 자신을 무시하고 모멸감을 주던 사람이나 집단에 대한 복수심, 정치적 희생물이 된 동료나 동지에 대한 복수심의 발현, 사회적 위계질서에 대한 복수심, 경제적 강자에 대한 복수심 등 수많은 복수심들이 현대 사회에도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복수는 적절한 통제가 된다면 생산적인 encouragement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그 자체가 아주 유치한 감정이라는 것이 철학적 평가이다. 복수라는 것 자체가 사람들의 짜릿한 즐거움을 주지만 복수를 기반으로 조성된 사회는 그 야수적인 사회로 그 질적 수준이 아주 낮은 사회라고 볼 수 있다.
베이컨은 ‘복수는 난폭한 정의다. 사람의 본성이 복수를 탐낼수록 법은 그것을 더욱 근절해야만 한다.’고 했다. J. 포드는 ‘복수에 대하여 복수는 그 자체의 처형자를 부르고 만다.’고 했다. 초서에는 ‘복수는 다른 복수로, 악행은 다른 악행으로 해소되지 않고 악순환과 악화만 초래한다.’는 말이 있다.
파이드루스는 ‘복수는 인내 앞에서 무력하다.’고 했으며 밀턴은 ‘복수는 처음에는 달지만 머지않아 쓰디쓴 보복을 초래한다.’고 했다. 철학자 에픽테투스는 ‘용서가 복수보다 더 낫다. 용서는 부드러운 본성의 표시이고 복수는 야만적 본성의 표시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또한 셰익스피어는 ‘쾌락과 복수심은 올바른 판단에 대해 독사처럼 귀머거리이다.’고 했고 또한 ‘현명한 사람들은 피해를 않아서 한탄하지 않고 보복의 방법을 기꺼이 찾아낸다.’고 했다.
멍청한 사람들은 복수의 길을 찾지 못하고 똑똑하고 총명한 사람들은 복수의 길을 찾는다. 그러나 현명한 철학자는 복수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재능이 있는 주인공이 폭군에게 시원한 복수를 하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지만, 현실에서는 복수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수 십 년간 우리나라의 정치가들이 복수에 혈안이 되어있는 것이 안타깝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나라를 통치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옛 철학자의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라이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축구팬이 본 한국대표팀에 아쉬운 점 (0) | 2021.11.18 |
---|---|
꿈에 관한 명언 (0) | 2021.10.19 |
세계의 친환경 장례와 시신처리 방식 (0) | 2021.10.10 |
올림픽 축구 한국 대 멕시코 경기 후기 (0) | 2021.08.03 |
음식에 관한 명언 (0) | 2021.06.22 |
댓글